추한 나여도, 너여도 괜찮기를 | YES24 모바일 문화웹진 채널예스

글ㆍ사진이나영
나의 우울과 고단함을 숨기지 못한다. 굳이 숨기려 들지 않고 싶다. 항상 행복한 모습만을 보여줘야 하는 것만큼 고단한 것도 없다. 모두가 지니고 사는 우울, 외로움, 고독, 슬픔과 같은 ‘추한 감정’들을 굳이 알리지 않아야 할 이유도 없다. 이게 다 우리가 사는 모습일 테니.
누군가는 이런 나의 생각에 반대할 게다. 다 같이 힘들고 고단한 삶, 서로 좋은 모습만 보여주는 게 낫지 않겠냐고. 물론 이 역시도 맞는 이야기다. 다만 나의 경우는 내 감정을 겉으로 표현해내지 못하면 스스로 앓는 타입이라, 밖으로 끄집어 내어야 내가 살 만해진다. 고통을 누군가가 분담 해 주었으면 하는, 관심 종자라고 해도 괜찮다. 그게 맞는 이야기인 것 같다.
감정이란 퍼지는 법이어서, 행복해하는 사람이 있으면 덩달아 함께 기뻐지고, 슬프고 우울해하는 사람이 있으면 같이 음울한 기운이 전해진다. 이걸 아는 데에도 나는 내 ‘추한 감정’들을 숨기고 싶지 않은 때가 많다. 나는 우울을 자주 지니고 사는 사람이기에, 남의 우울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 내 솔직함만큼 다른 이의 솔직함도 받아들이고 싶다. 그걸 나눌 수 있는 관계가 된다면 우리는 비로소 친한 사이가 된다고 믿는 사람이다.
가끔 만나는 사람들이 내게 이런 말을 해 얼굴이 많이 좋아졌네 무슨 좋은 일 있니 좋았던 일도 있었고 안 좋은 일도 있었죠
근데 왜 안 좋은 일은 안 묻나요
그대가 아는 것만큼 난 좋은 애가 아니에요 나쁜 생각도 잘하고 속으로 욕도 가끔 해요 웃는 내 모습이 좋다면 슬픈 나도 좋아해 줘요 난 그대 우는 모습도 좋거든요
우린 완벽하지 않고 가끔 억지도 부리는 걸 때론 마음이 너무 아파 푹 주저앉고서 울곤 해
지금이 그렇다면 내게 모두 말해주세요 그대를 내 어깨에 기대 찬 바람에 얘길 떠나 보내요 - CHEEZE, 노래 <퇴근시간>, 1.5집 『PLAIN』 중
그렇기에 나의 경우는 친애하는 내 사람들이 나에게 본연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을 때 섭섭함을 느끼는 편이다. 그 사람의 그런 모습에 호소한 적도 있다. 나는 이렇게 솔직하게 털어놓는데, 너는 왜 내게 그러지 않으냐고. 몇 사람과의 대화를 통해 이젠 그 호소가 그들에게 강요처럼 느껴지기도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여전히 나는 나이기에 그들이 내게 기대어 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아직도 한다.
내게 가장 기대었으면 하는 사람이 힘든 일을 좀체 털어놓지 않자 나는 호소했고, 그가 답했다. “힘든 건 나 하나만으로 족해. 너에게도 옮기고 싶지 않아”라고. 그는 분명 참는 게 버릇인 사람이었다. 그는 그의 ‘추한 감정’이 죄인 것마냥 나에게 짐을 지우고 싶지 않아 했다. 그것 역시 나를 아껴서 한 행동인 것도 물론 알고 있다. 그래서 그를 이해하려고 노력 중이다. 하지만 문득 왜 이런 감정들이 ‘추한’ 것 마냥 취급되고 있느냐는 생각이 드는 것은 멈출 수 없었다. 행복을 추구하는 존재인 우리들이지만, 그 속에서 행복만을 느끼고 살 순 없으니까.
추함은 인간의 존재 조건과 맞닿아 있다. 만약 고단한 인생사로 노래 가사를 쓴다면 고통, 소외, 질병, 노화 그리고 추함으로 후렴구를 만들어야 할 것이다. 추한 외모 덕분에 팔자가 피는 경우는 매우 드문 일이다. 대개 그 반대라고 해야 할 것이다. 추함은 개인을 위축시키고 소외시키며 집요하게 괴롭히고 많은 자유를 앗아간다. 그런데 마치 스스로가 그런 불운을 만들어낸 것처럼 추함은 개인을 죄인으로 만든다. - 클로딘느 사게르, 책 『못생긴 여자의 역사』 서론 중
내 우울함에 솔직해지고 싶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지금 이 우울을 같이 느끼지 않아 공감을 해 주지 못하는 사람과의 대화는 꺼려한다. 나는 그다지 포용력이 좋지는 않은 사람인 게다. 그래서인지 내가 괜찮지 않은 상태일 때, 긍정적인 에너지가 넘치는 이들과는 대화가 무척이나 힘들다. 그를 그대로 또 받아들이지는 못한다. 사실은 공감해주길 바랐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내 ‘추한 감정’이 온전히 받아들여지지 않아 떼를 쓰는 행동인 것도 같다. 내 감정이 그대로 인정되지 않으면 거기서 또 실망하게 되는, 이기적인 나인 것이다.
긍정이 넘치는 이와 함께 있을 때 견디기 어려워하는 까닭은 아마도 나도 그와 같이 밝아지고 싶은데, 지금의 나는 그렇지 않아서이기도 하다. 비교하게 되어서. 이럴 때는 SNS를 하지 않는다. 음, 하게 되더라도 나는 내 감정을 그대로 게재하고, 기쁜 그들의 이야기는 이전처럼 깊게 들여다보지 않는다. 더 비교하면 내가 초라해질 것 같아서. 이렇게 말하니 정말 속 좁은 사람 같은데, 그건 사실이다. 나는 내가 힘든 순간까지 남의 행복이 곧 나의 행복이라고 할 만큼 속이 넓은 사람은 되지 못한다. 그래도 가장 중요한 건 나의 감정이고, 내 감정과 남을 비교하며 수치심을 느끼기도 하는 속 좁은 사람이 맞다.
추함은 수치심을 느끼게 한다. "흄은 기쁨과 고통을 아름다움과 추함의 본질 그 자체로 본다." 추함이 고통스러운 것은 타인과 비교되는 자신의 모습을 인식하기 때문이다. 추함이 겸허로 이어지는 것은 전혀 다른 사람이 되고 싶은 욕망이 실현 불가능한 일임을 존재가 정확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자기폄하로 인한 자존감의 상실로 어떤 다른 모습을 상상한다는 것이 아예 불가능한 탓도 있다. 이 같은 비가역적 상황 때문에 존재는 자신을 수치스럽게 느낀다. 그것은 무기력 상태, 다시 말해 자유가 전혀 없는 자신의 상태를 수치스러워 하는 것이다. '나'와 '나'가 바라는 존재 사이의 간극은 본질적으로 고통스러운데, 추한 존재는 그 다른 '나'에 대해 상상해 볼 의지조차 갖지 못한다. - 클로딘느 사게르, 책 『못생긴 여자의 역사』 3부 3장 중
어쩌면 내게 자신의 고통을 털어두지 않았던 사람들도 나와 같은 생각이었을 지도 모르겠다. 내가 그들보다 밝아 보여서, 혹은 제대로 공감해주지 않을 것 같아서. 어떻게 하면 진심이 담긴 마음으로 다른 사람의 추함까지 받아들일 수 있는 포용력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내가 당신의 우는 모습도 좋아한다고 해서, 그것이 그에게 큰 위로가 되지 않을 수도 있겠다. 그저 나는 당신이 어떤 상태이던 네 편이 되어주겠노라는 믿음이 있으면 될까.
나는 이기적인 감정을 지닌 사람이지만, 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언제나 네 편이라는 믿음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겠다는 꿈은 가지겠다. 여전히 내 추한 감정들을 바깥으로 토해내겠지만, 이 감정을 나눌 수 있는 사람들이 내 옆에 더 많이 생기기를. 내 솔직함이 다른 이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 선에서, 내 사람들과 내가 감정을 나눌 수 있는 방법을 언젠가는 찾아 낼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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