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구 100만명당 확진자 세계 최고가 된 스위스 - 시사IN

개인의 자유를 중시하는 문화는 코로나19 대응에 영향을 끼친다. 국가비상사태 선포에도 사람들은 산으로 호수로 모였다. 스위스 민주주의의 특수성 탓에 위기 대응이 꼬였다는 시각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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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단톡방처럼, 스위스 사람들도 와츠앱을 이용한 채팅방을 애용한다. 동네 여성 주민들의 채팅방에서 얼마 전 ‘패싸움’이 일어났다. 스위스 연방정부가 코로나19로 인한 국가비상사태를 선포(3월16일)한 직후였다.
한 일본인이 “놀이터에서 아이들이 다섯 명 이상 모여 놀지 않도록 조심하자”라고 제안한 것이 시작이었다. 나를 비롯한 몇몇이 ‘사회적 거리두기’가 제대로 안 되고 있다는 대화를 했다. 그러자 독일인 A가 “패닉에 빠지지 말자”라며 과잉반응이라고 했다. 우크라이나인이 “스위스 상황을 보면 패닉에 빠져야 할 때”라며 반박했다. 수년 전 이 채팅방을 개설한 독일인 B가 나섰다. 그가 “매우 실망스럽다.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에게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없다. 놀이터에서 몇 명이 모여 놀건 각자의 선택에 맡길 일이다. 이런 대화를 하려거든 따로 나가서 채팅방을 만들라”고 말하자 분위기는 더 험해졌다. 아르헨티나인과 그리스인이 “개방적 의사소통은 민주주의의 기본”이라며 반발했고, 스위스인과 파라과이인이 “의견을 막아서는 안 된다. 단 서로 존중하며 얘기하자”라고 거들었다. 결국 처음 대화를 시작한 일본인이 사과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 채팅방 소동은 내게 무척 흥미로웠다. 중대한 위기에서도 속한 문화권에 따라 개인이 반응하는 정도가 제각각이었다. 이 개인적 반응의 차이는, 스위스를 비롯한 유럽 국가들이 위기에 한 발짝 늦게 대응하는 이유를 어느 정도 설명하는 것 같다. 집단의 이익만큼 개인의 자유도 중시하는 유럽 문화와도 맞닿아 있다.
아시아 국가들이 사투를 벌이는 동안 스위스는 강 건너 불구경이었다. 국경을 맞댄 이탈리아가 심상치 않자, 2월28일(스위스 확진자 15명, 이탈리아는 889명)에야 1000명 이상이 참여하는 공공 이벤트를 금지했다. 그때도 위기감은 없어 보였다. 딸이 다니는 초등학교에서 보낸 유일한 코로나19 관련 공지는 ‘아이들이 걱정하니 과잉 대응하지 말고 안심시켜주기 바란다’는 내용과 손 씻기 안내문이었다. 극장 등 공공시설에서 100명 이상 모임이 금지됐을 땐 매 상영시간에 99명씩 꽉 채워 관람하기도 했다.
갑작스러운 변화는 3월13일 오후, 스위스 연방정부가 전국에 휴교령을 내리면서 시작됐다. 이날 누적 확진자는 1139명이었고, 이탈리아의 상황(1만7660명)은 참담했다. 당일 오전까지 대부분 휴교를 예상하지 못했다. 오전 수업만 했던 초등학교 저학년 아이들은 긴 휴교를 앞두고 교사·친구들과 인사도 나누지 못했다. 스위스 전역의 마트에서는 이전에 볼 수 없었던 사재기가 시작됐다. 몇 년째 이곳에 살면서 스위스인들은 냉정하리만치 이성적인 사람들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믿기 어려운 광경이었다. 휴교 3일 뒤인 3월16일, 스위스 연방정부는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고 독일·프랑스·오스트리아 국경을 통제한다고 발표했다. 슈퍼마켓, 약국, 주유소를 제외한 상점 대부분이 문을 닫았다. 나는 한국 뉴스에서 본 텅 빈 거리를 예상했다.
스위스는 달랐다. 맑고 따뜻한 날씨에 사람들이 산으로, 호수로 모여들었다. 평소보다 인파가 더 넘친다는 인증샷이 줄을 이었고, 거기엔 ‘바이러스에 굴하지 않는 쿨한 스위스 사람들’이라는 댓글이 붙었다. 동네 놀이터는 학교에 가지 않는 아이들과 부모들로 북적였다.
군까지 동원된 국가비상사태에도 사회적 거리두기가 제대로 되지 않자, 스위스 연방 보건청은 3월20일 한 단계 격상된 조치, 즉 공공장소에서 5명 이상 모임 금지를 발표했다. 어길 경우 벌금 100스위스프랑(약 13만원)이 부과됐다. 휴교에서 5명 이상 모임 금지까지 걸린 시간은 7일. 손 놓고 있던 정부가 단 며칠 만에 대응조치를 몇 단계나 격상시키자 시민들은 그 속도를 따라잡지 못해 우왕좌왕했다. 3월25일, 스위스의 누적 확진자 수는 한국을 추월했다. 인구 100만명당 확진자 수는 1259명으로, 인구수가 적어 무의미한 국가를 제외하면, 이탈리아를 제치고 세계 최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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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친 민주주의가 감염병 대응에 독?

역설적으로 스위스 민주주의가 지나치게 발달했기 때문에 위기 대응이 꼬였다고 보는 이들도 있다. 스위스는 26개 칸톤(주)이 자치권을 갖는데, 이번처럼 연방위원회가 전체 칸톤의 컨트롤타워를 하며 전국적인 지침을 내리는 일은 그동안 거의 없었다. 스위스는 주요 결정이 국민투표로 이뤄지는 나라다. 그러다 보니 투표를 거치지 않은 일방적인 지침에는 사람들이 거부감을 갖는다. 위중한 상황이지만 3월25일 현재까지 스위스가 인접 국가들처럼 록다운(폐쇄)에 들어가지 않은 것도 이 때문이다. 알랭 베르세 스위스 내무장관의 말이다. “이것(록다운을 하지 않는 것)은 매우 스위스적인 접근이다. 조치는 모든 사람이 이해할 수 있게, 상식적으로 취해져야 한다.” 그러면서도 그는 “(5명 이상 모임 금지가) 자유사회에 아주 가혹한 조치지만, 약자를 보호하기 위해 필수적”이라며 시민들의 동참을 호소했다.
스위스가 한국보다 뒤떨어지는 또 다른 부분은 검사와 정보공개다. 스위스에서 매일 가능한 검사 수는 최대 7000건(한국은 2만 건)이다. 인구 100만명당 검사 건수는 스위스가 5800건(3월21일 기준)으로 한국(6150건)과 비슷해 보이지만, 문제는 검사에서 확진자가 나오는 비율이다. 한국은 검사 후 확진받는 사람이 2.8%이지만, 스위스는 15%다. 기침·몸살 같은 증상이 있어 콜센터에 전화를 걸어도 아주 심하지 않다면 검사를 해줄 수 없으니 집에서 쉬라고 하더라는 얘기를 주변에서 많이 들었다. 검사를 받고 싶어도 받을 수가 없으니 불만이 쌓인다.
각종 통계가 잘 정리되지 않아 불신이 커지는 것도 문제다. 각 칸톤은 코로나19 관련 수치를 자체 집계 뒤 중앙정부로 보내는데, 집계 방식이 21세기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구식이다. 종이로 된 양식에 각 칸톤이 숫자를 써서 팩스로 중앙정부에 보내면 그걸 하루에 한 번씩 정부가 합산해 발표한다. 이런 식이니 한국처럼 매일 브리핑은 불가능하다. 일주일에 두 번 공개 기자회견이 전부다.
스위스 의료 인력은 이 사태를 감당하기에 역부족이다. 정부는 의료인들에게 증상이 있어서 검사를 받더라도 양성반응이 나오기 전까지는 계속 일하라고 권고했다. 심지어 확진을 받더라도 48시간 동안 집에서 쉰 뒤 증상이 심하지 않다면 병원으로 돌아와 마스크를 쓰고 일을 하라고 주문했다. 의료인이 다른 환자를 감염시킬 수도 있는데도 이 같은 위험한 권고를 한 점은 납득하기 어렵다.
이것은 스위스 의료 인력의 특수성 때문이다.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에서 출퇴근하는 의료인이 많다. 프랑스와 가까운 제네바에는 프랑스에서 출퇴근하는 의사와 간호사가 많고, 이탈리아와 접경한 티치노에선 국경이 봉쇄된 지금도 이탈리아인 간병인과 의사가 매일 2000명 넘게 국경을 넘는다. 스위스 인접 국가들이 자국의 의료 인력을 잡아두는 상황이 생길 수도 있다. 프랑스에서 그런 조짐이 보이는데, 현실화될 경우 제네바 대학병원은 간호사의 절반, 의사의 17%를 잃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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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적 지원과 정신건강 관리는 주목

유럽에는 스위스보다 더 강력한 조치(록다운)에 들어간 나라가 많다. 잘 안 먹히기는 마찬가지다. 내 남편은 스페인 사람이고 시어머니가 현재 스페인 발렌시아에 산다. 스페인 정부의 통행금지 지침을 따르지 않아 체포되거나 벌금을 문 사람들 이야기를 매일 전해 듣고 있다. 일주일 만에 체포된 사람이 350명, 벌금 선고가 3만1000건이 넘었다. 외출이 가능한 예외 조건 중 하나가 애완동물 산책이라서, 이걸 악용하는 이들도 있다. 스페인 인터넷에는 ‘산책용 개를 돈 받고 빌려준다’는 글이 넘쳐난다. 한 번 산책에 5유로부터 25유로까지 받는다.
위기 상황에 가짜 뉴스가 기승을 부리는 건 어디나 비슷하다. 시어머니는 누군가 와츠앱으로 보내준 걸 읽었다며 “코로나19는 나처럼 나이 많은 연금생활자들을 죽이려고 정부가 퍼뜨린 것”이라는 음모론을 펼쳤다. 남편이 스페인 친구들과 쓰는 채팅방에는 더 구체적인 음모론이 잘 정리된 문서로 등장했다. “코로나19는 세계경제를 장악하려는 중국이 퍼뜨린 것이다. 의심을 받지 않기 위해 우한이라는 도시를 먼저 희생시켰고, 그곳에서 전 세계로 바이러스를 퍼뜨림으로써 미국과 유럽이 기능을 멈추게 만들었다.”
코로나19 국면에서 유럽은 대개 실망스러웠지만, 주목할 부분도 있다. 첫째는 정부의 경제적 지원이다. 스위스 정부는 3월13일 전국적 휴교령과 동시에 100억 스위스프랑(약 13조원)의 경제 지원을 발표했다. 일주일 뒤인 3월20일에는 추가로 320억 스위스프랑(약 41조원)을 지원하겠다고 했다. 관광, 문화, 스포츠 부문과 더불어 노동시장에 자금을 유입시켜 노동자의 임금을 보전하고, 정규직뿐 아니라 프리랜서와 임시직, 그리고 직업교육을 받는 수습 직원까지도 일자리를 잃지 않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둘째는 정신건강 관리다. 현재 스위스의 심리상담센터 상당수는 전화통화나 화상통화를 이용한 상담 서비스를 하고 있다. 취리히 대학병원은 부부를 위한 온라인 상담을 무료로 제공한다. 심리상담 무료 봉사에 나선 전문가도 늘고 있다. 재택근무가 장기화되면서 가정 내 갈등이 커지고, 갓 출산한 산모 등 우울증에 걸리기 쉬운 사람들은 요즘 같은 때 더 위험할 수 있어서다.
내가 사는 아파트 엘리베이터 앞에는 리스트가 새로 하나 붙었다. 바이러스 때문에 마트에 가기 어려워하는 노약자를 대신해 쇼핑을 해주려는 사람들이 자신의 연락처를 남기는 것이다. 시어머니가 있는 발렌시아의 작은 동네 알무사페스에서는 생일을 맞은 아이들의 집에 경찰관들이 깜짝 방문해 축하를 해준다. 주민들이 경찰관들과 함께 발코니로 나와 다 같이 생일 축하 노래를 불러준다.
중국에서 발생한 코로나19라는 이름의 태풍이 유럽을 휩쓸기 시작했다. 피해 규모는 얼마일지, 어떤 조치가 유효한지, 유럽 사회가 어떻게 대응해나갈지 말하기에는 이르다. 이곳은 아직 태풍의 규모나 강도도 가늠하지 못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