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정아파트에 이어, 현존하는 서울의 아파트 중 두 번째로 오래된 동대문아파트에 다녀왔다. 부서진 창틀이나 페인트가 벗겨진 외벽 따위의 낡고 허름한 외양을 상상하며 도착한 곳에는, 반백 년이라는 세월이 무색할 만큼 깔끔하고 정갈한 모습의 아파트가 굳건히 자리하고 있다.
동묘앞역 7번 출구로 나와 오른쪽으로 조금만 걸으면 높이 세워진 은행 건물 옆으로 겨자색과 녹두색 페인트칠로 생기를 더한 동대문아파트가 모습을 드러낸다. 불과 2년 전까지만 해도 부스러진 외벽이 그대로 드러나 낡고 스산한 느낌을 물씬 풍겼지만, 지난 2015년 보수공사를 통해 깔끔한 모습으로 다시 태어났다.
한때 ‘연예인 아파트’라 불린 꿈의 주택, 동대문아파트
서울 종로구 창신동에 위치한 동대문아파트는 1965년에 완공된 7층짜리 아파트다. 건물 중앙 부분에 공간을 둔 중앙정원형 설계구조로, 가운데가 뻥 뚫린 ‘ㅁ’자 모양을 하고 있다. 이러한 구조로 인해 자연 채광을 고스란히 받을 수 있어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한껏 자아낸다. 뚫린 가운데 공간에는 도르래를 달아 줄을 끼우고 잡아당겨 빨래를 넌다. 요즘같이 저마다 방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살아가는 때에는 널브러진 이웃의 빨랫감마저 인간적이고 사랑스럽게 느껴지곤 한다. 장독대, 고장이 난 냉장고, 낡은 수납장 같은 제 기능을 상실한 물건들이 복도에 무질서하게 쌓인 모습도 심심찮게 마주할 수 있다.
층마다 바닥에 층수가 표시되어 있다. 옥상으로 통하는 계단은 자물쇠가 굳게 잠긴 철창을 세워 막아 두었다
각 세대 출입문 바깥으로 설치된 굴뚝의 모습. 마치 서로를 향해 겨누는 총구 같기도 하다
동대문 아파트는 1993년 위험시설물 C등급(조속한 보수가 필요한 상태)을 받은 이후로도 계속해서 중정 굴뚝 부분이 전도될 위험이 있다는 우려가 나왔다. 입주민에게 이 사실을 알렸으나, 영세한 세입자들이라 마땅한 대책을 마련할 수 없었다. 결국 후원기업을 찾아 보강공사를 진행했고, 현재는 B등급 상태다.
동대문아파트 1층 전경
1층에서 올려다본 모습
지금이야 세월을 한껏 머금어 기묘한 풍경을 간직한 건축 유산이 되었지만, 1960년대만 해도 동대문아파트는 유럽의 아파트를 모델 삼은 새로운 주거문화의 실험장으로 야심 차게 등장한 1세대 고급 아파트였다. 실제로 코미디언 이주일, 가수 계수남, 배우 백일섭 같은 인기 연예인들이 많이 거주해 일명 ‘연예인 아파트’라 불리기도 했다. 그후 2007년 낙후한 시설로 인해 철거 위기에 내몰렸지만, 서울시가 역사적, 문화적 보존 가치가 높다고 판단해 2013년 서울 속 미래유산으로 지정했다. 살아있는 화석처럼 도심 한복판에 굳건히 자리를 지켜온 덕에, <세븐 데이즈>(2007), <숨바꼭질>(2013) 같은 여러 영화의 촬영장소로도 쓰였다.
영화 <숨바꼭질>에 나온 동대문아파트의 모습
60년대식 독특한 구조를 갖춘 최고급 연예인 아파트에서 수십 년 후 위험 시설물로 지정되어 철거 위기를 맞고, 오늘날 다시 서울의 미래유산으로 불리기까지. 동대문아파트는 그간의 세월을 묵묵히 떠안고 의연히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동대문아파트 인근 맛집, 카페
1. 히말라얀 레스토랑
동묘앞역 근처에는 유독 인도와 네팔 음식점이 많다. 실제로 인도나 네팔에서 온 외국인 노동자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기 때문에 자연스레 생겨난 것. 동묘앞역 9번 출구로 나오면 오른편 건물 3층에 히말라얀 레스토랑이 있다. 숨은 맛집으로 소문난 가게답게, 한가로운 오후에도 손님이 꽤 많다. 부드러운 코타지 치즈로 맛을 낸 시금치 커리와 렌틸콩, 마늘, 토마토, 향신료로 만든 인도식 커리, 버터를 두른 숯불구이 빵, 인도 콩과 향신료로 맛을 낸 매콤한 콩 요리까지, 메뉴도 가지각색이다. 외국인들 틈에 섞여 홀로 낯선 시금치 커리를 먹다 보니 서울이 아닌 것 같은 착각도 든다. 한국인 입맛에 맞게 변형된 요리가 아닌, 인도와 네팔 현지의 맛을 고스란히 살린 레시피가 특징이다.
메뉴 시금치 커리, 치킨 커리, 탄두리 치킨, 플레인 라이스주소 서울시 종로구 종로 337전화 02-3672-1566영업시간 11:00~23:00
2. 황기순의 칼국수&왕돈까스
동묘앞역 3번 출구에 위치한 황기순의 손칼국수&왕돈까스. 싼 가격에 푸짐한 양과 깊은 맛으로 유명한 가게로, 종로구에만 해도 벌써 세 곳이 문을 열었다. 손으로 직접 반죽한 24시간 숙성면과 남해산 멸치를 넣고 우려낸 육수로 만든 손칼국수, 국내산 냉장육으로 만든 왕돈까스 등 최상의 식재료로 만든 메뉴를 저렴한 가격에 먹을 수 있어 손님이 줄을 잇는다. 깊은 맛의 사골육수에 담긴 쫄깃한 국수 면발을 입에 넣는 순간, 인기의 비결을 알 수 있다.
메뉴 돈가스, 멸치 칼국수, 사골 칼국수, 비빔국수, 튀김만두주소 서울시 종로구 종로 370-1전화 02-2235-3399영업시간 09:30~21:30
3. 호로록 카페
카페베네, 스타벅스 등 프랜차이즈 커피숍으로 가득한 동묘앞역 근처에 생겨난 개인 카페. 9번 출구 왼쪽에 위치한 파리바게트 골목으로 조금만 들어가면 멋스러운 한옥 느낌이 물씬 풍기는 호로록 카페가 나타난다. 커피 외에, 과일 스무디, 직접 담근 청으로 만든 수제 차, 시원한 빙수와 에이드 같은 다양한 메뉴가 준비되어 있다. 음료를 주문하면 곁들여 먹을 수 있는 달콤한 초콜릿과 과자도 같이 나온다. 고즈넉한 분위기의 널찍한 테라스도 있어,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커피를 홀짝이기도 좋다.
메뉴 커피, 스무디, 주스, 에이드, 차주소 서울시 종로구 지봉로 37-18전화 02-747-7095영업시간 09:30~23:30 (주말, 공휴일 11시 오픈)
그리고, 동묘 벼룩시장
동묘까지 온 김에 벼룩시장을 그저 지나칠 수 없는 노릇. 동묘앞역 3번 출구로 나와 뒤편으로 몇 발자국 걷다 보면 동묘 벼룩시장의 입구인 중앙길이 펼쳐진다. 오래된 카메라와 라디오, 중고서적, 도자기, 자전거 등 없는 물건을 찾기가 더 어려울 정도다. 일요일의 동묘 벼룩시장은 여기저기 널브러진 옷더미 속에 얼굴을 파묻고 ‘득템’을 하려는 손길들로 분주하다. 수북하게 쌓아 놓은 헌 옷가지들 속에서 취향대로 골라 집으면 한 장에 단돈 천 원, 이천 원이다. 옷더미를 헤칠 때마다 세월에 묵은 먼지가 펄럭인다.
글/사진 최은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