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석희 사건’이 아니라 ‘조재범 사건’이다 : 네이버 뉴스

쇼트트랙 여자 국가대표팀 심석희 선수에 이어 전직 유도선수였던 신유용 씨가 고교 시절 코치에게 상습 성폭행을 당한 사실을 고발하면서 체육계 전반으로 ‘미투’가 확산되는 분위기다. 서지현 검사의 폭로를 계기로 사회 전반에 미투 운동이 들불처럼 번지던 1년 전과 꼭 닮은 양상이다.
1년 전 미투 보도처럼 피해자를 부각하거나 가해 행위를 선정적으로 묘사하고, 피해자의 사진을 동의없이 사용하는 등 2차 피해를 양산하는 보도가 쏟아지고 있다. 그러나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에 초점을 맞춰 보도하고, 온라인에 피해자의 사진을 싣지 않는 등 일부 언론의 변화된 모습도 보인다.
심석희 선수가 고등학생 때부터 자신을 상습 성폭행한 혐의로 조재범 코치를 추가 고소한 사실을 SBS가 보도한 지난 8일부터 14일까지 네이버엔 관련 기사가 6000건 가까이 쏟아졌다. 하루 평균 800건이 넘는 기사가 나온 셈이다. 피해자의 폭로 내용을 ‘받아쓰기’ 한 기사가 다수였다. 같은 기간 제목에 심 선수의 이름이 들어간 기사만 1700건이 넘었다. 일부 언론은 이번 사건을 아예 ‘심석희 사건’으로 명명했다.
한겨레가 신유용씨의 실명 폭로를 보도한 지난 14일에도 네이버에 하루 500건 넘는 기사가 쏟아졌다. 이 중 380건 이상은 신씨의 이름을 제목에 썼다. 코치의 가해 행위를 “몹쓸 짓”이라고 표현한 언론사도 있었다. ‘피해자 보호’라는 원칙을 무시한 보도도 많았다. MBN은 14일 신씨의 페이스북 프로필 사진을 온라인에 크게 실었다가 삭제했다. 연합뉴스는 지난 10일 <심석희 폭로…체육계 쑥대밭 만든 ‘한국판 나사르’ 사태 되나>란 제목의 기사를 송고했다가 피해자에 책임을 지우는 것 같다는 지적을 받고 <조재범 전 코치 파문 ‘한국판 나사르’ 도화선 되나>로 제목을 수정했다.
선정적인 해시태그나 이미지 사용도 여전했다. 노컷뉴스는 페이스북 계정에 <女선수, 성폭행에 취약할 수밖에 없는 구조적 이유>란 제목의 기사를 공유하면서 선정적인 문구와 함께 해시태그를 달았다. 비난이 쏟아지자 사과도 없이 삭제했다. 한겨레 등에 따르면 심 선수와 신씨 측은 언론의 선정적인 보도 등에 법적 대응한다는 방침이다.
성폭력 피해자의 적극적인 언론 대응과 언론 보도에 대한 비판적인 여론 등 지난해 미투 당시와 사뭇 다른 분위기도 감지된다. 변화는 정치권과 일부 언론 보도에서 드러난다. 홍영표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는 지난 10일 정책조정회의에서 심석희 선수를 그냥 ‘선수’라고만 언급했고, 같은 당의 안민석 의원은 국민체육진흥법 개정안을 발의하며 ‘심석희법’이란 표현을 ‘운동선수 보호법’으로 바꿨다. 성폭력 피해자를 전면에 내세우지 말자는 공감대가 커지고 있는 것이다.
경향신문은 지난 10일 사설에서 “이번 사건을 ‘심석희 성폭행 의혹 사건’이 아닌 ‘조재범 성폭행 의혹 사건’으로 부를 것을 제안한다”면서 “가해자의 이름으로 사건 프레임을 짜는 것은 그 자체가 사회정의에 부합한다”고 주장했다. 같은 날 MBC도 ‘뉴스데스크’ 앵커 멘트를 통해 “가해자로 지목된 코치의 이름을 따서 ‘조재범 성폭행 의혹사건’으로 부르기로 했다”고 밝혔다. 박성제 MBC 보도국장은 “조두순 사건도 처음에 나영이 사건으로 불리다가 바뀐 것처럼 심석희라는 이름을 자꾸 쓰면 피해자에게 초점을 맞추게 된다는 지적이 나와서 아예 시청자 앞에서 선언을 한 것”이라며 “선수촌 등을 취재하는 과정에서도 인터뷰를 따기 위해 무리하게 취재하지 않고 선을 지키기 위해 조심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한겨레는 온라인 기사에서 심석희 선수와 신유용씨의 사진을 아예 뺐다. 신문에는 선수 시절 사진이나 본인이 동의한 사진을 게재했지만, 확산이 용이한 디지털에는 사진을 전혀 싣지 않고 제목에서도 가급적 피해자의 이름을 빼고 있다. 이종규 한겨레 디지털영상부문장은 “편집회의에서 피해자를 주목하는 것은 문제가 있으니 쓰지 말자는 결론을 내렸다”며 “제목도 불가피한 경우를 빼고는 피해자 이름을 쓰는 것을 최소화 하고 있다”고 전했다.
선수들이 심적·물적 피해를 무릅쓰고 용기 있게 폭로에 나섰지만, 만약에 있을지 모를 2차 피해를 방지하기 위해 언론이 더 신중을 기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조호연 경향 논설주간은 “이런 류의 성범죄 사건에서 당사자 이름이 알려지는 게 획기적인 전환의 계기를 만든다. 하지만 당장은 본인의 의사와 무관하게 2차 피해가 가해질 소지가 있기 때문에 당사자들의 이름은 최소화 하자는 것”이라며 “그동안 사건이 벌어질 때만 잠시 끓어오르고 변화의 폭도 적었는데, 이번엔 획기적인 전기가 마련되길 바란다. 그래야만 용기를 낸 당사자들에게도 의미가 있지 않을까”라고 말했다.
김고은 기자 nowar@journalist.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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