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열일곱 살 때였다. 도산 안창호(1878~1938) 선생의 마지막 설교를 눈 앞에서 들었다. 목사님 설교보다 더 감동적이더라. 나는 그때 신앙에도 ‘그릇의 크기’가 있음을 깨달았다.”
지난달 28일 서울 은평구 홍은동의 한 커피숍에서 ‘100세 철학자’ 김형석(100) 연세대 철학과 명예교수를 만났다. 그는 최근 신앙에세이 『삶의 한가운데 영원의 길을 찾아서』(열림원)를 출간했다. 책의 띠지에는 ‘나의 인생관, 가치관, 소유관은 이대로 좋은가?’라는 글귀가 박혀 있다. 크리스천인 김 교수는 ‘진정한 종교’ ‘참다운 신앙’에 대해서 때로는 파격적으로, 때로는 영성적으로 답을 내놓았다.
김형석 연세대 철학과 명예교수는 "나는 17살 때 학교에서 하는 신사참배 문제로 고민이 많았다. 그때 들은 도산 안창호 선생의 설교는 내게 큰 힘이 됐다"고 말했다. 우상조 기자
“올해까지는 지팡이를 짚지 않을 작정”이라는 그는 소파에 앉아서 2시간이 훌쩍 넘어가는 인터뷰를 거뜬히 소화했다. 피곤한 기색도 없었다. ‘인터뷰 말미에 꼭 건강 비결을 물어봐야지’란 생각이 절로 들었다. 100년의 세월, 100년의 인생. 그 자리에 서서 돌아보면 보일까. 우리네 삶에서 무엇이 정말 값진 것인지 말이다. 백발의 노교수에게 물음을 던졌다.
“평양 부근의 송산리에 있던 송산리 교회에서 도산 선생의 설교를 들었다. 당시 청중 200명이 모였다. 1시간 가량, 긴 설교였다. 내게 신앙을 가르쳐 준 분은 두 목사님이다. 두 분 다 말년에 그렇게 존경받는 크리스천은 되지 못했다. 그런데 신학자도 아니고, 목사도 아닌 도산 선생의 설교는 다르더라.”
“목사님들의 설교는 비슷비슷했다. 도산 선생의 설교는 달랐다. 그는 ‘우리 사랑하자’고 웅변했다. 그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교훈이라고 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건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을 사랑해주시는 것과 같다고 했다. 나는 그런 설교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 목사님들은 주로 교회 이야기를 했으니까. ‘저 어른은 애국심이 있어서, 기독교를 저렇게 크게 받아들였구나’ 싶더라. 신학자다, 장로다, 목사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더라. 신앙에도 ‘그릇의 크기’가 있더라.”
“그릇이 작으면 작은 신앙밖에 못 가지고, 그릇이 크면 큰 신앙을 가진다. 장로였던 고당 조만식(1883~1950) 선생이나 도산 선생은 그릇이 컸다. 민족과 나라를 위한 그릇이니까, 신앙도 크게 받아들였다. 반면 작은 신앙은 교회만 생각하고, 교회만 위하는 신앙이다. 지금도 작은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많지 않나.”
김 교수는 “나는 개신교 안에 있지만, 교회주의는 아니다”고 강조했다. “예수님이 교리와 교권을 거부하지 않았나. 학생들이 종종 이렇게 묻는다. ‘스님이 쓴 책은 베스트셀러가 있는데, 왜 신부님이나 목사님이 쓴 책은 베스트셀러가 없나요?’ 그럼 나는 이렇게 답한다. ‘그 책들이 교리를 이야기하지, 인생을 이야기하지 않기 때문이다.’ ”
“예수는 ‘인생’을 이야기했다. 교리를 이야기하지 않았다. 예수 당시의 교리가 뭔가. 계명과 율법이다. 예수님은 그걸 거부했다. 대신 ‘이웃을 사랑하라’고 이야기했다. 그렇게 인생을 말했다.”
김형석 교수는 일본의 조치(上智)대학 철학과를 졸업했다. 그가 3학년일 때 김수환(1922~2009) 추기경이 철학과 1학년으로 입학했다. 조치 대학은 가톨릭 계열의 학교다. 김 교수는 “김수환 추기경은 대학 과후배다. 당시 조치 대학에는 가톨릭 신부인 한국인 학생이 여럿 있었다. 나는 개신교인이다. 그 신부님들과 이야기를 나누면 종교적인, 교리적인 거리감이 무척 컸다. 그런데 김수환 추기경과 이야기를 나눌 때는 달랐다. 거리감이 좀체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그 이유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다른 신부님들은 교리를 앞세웠다. 그럼 개신교와 가톨릭은 가까워질 수가 없다. 김수환 추기경은 달랐다. 그분은 신앙을 교리가 아니라 진리로 받아들였다. 나도 그랬다. 그래서 통할 수가 있었다. 그 시절 나는 가톨릭과 개신교는 하나의 나무에서 올라온 두 개의 가지라고 생각했다. 당시로선 굉장히 도발적이고 파격적인 생각이었다. 그런데 김 추기경도 그렇게 생각하더라. 그때 나는 학도병 입대 문제로 고민이 많았다. 그런 난관만 아니었어도 김 추기경과 뭔가 더 의미 있는 일을 해볼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런 아쉬움이 있다.”
“나는 어느 동네 사는지 먼저 물어본다. 집 근처에 어떤 교회가 있는지 물어보고, 교회가 없다면 가톨릭 성당에 나가도 괜찮다고 말한다. 가급적 큰 교회보다는 중견 교회로 가라. 교인 수가 1000명 정도 되는 교회라면 좋다. 그래야 목사님 지도도 받을 수 있다. 너무 보수적인 교회는 권하지 않는다.”
이 말끝에 김 교수는 ‘사랑과 자유’에 대해서 말했다. “진리가 왜 존재하는가. 인간을 자유롭게 하기 위해서다.” 아이들을 키울 때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장 자크 루소의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외침에 주목하라고 했다. “루소는 이렇게 말했다. 인간이 태어난 그대로 자유롭게 키워라. 종교적인 구속이나 교리적인 구속을 하지 마라. 자연스럽게 자연을 키우듯이 아이를 키워라.”
많은 부모가 아이 교육 문제로 고민한다. 아이를 사랑하지만 방법이 서툴 때도 많다. 자식 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게 뭔가.
“사람을 사랑하는 첫째 조건이 뭔지 아나. 그 사람의 자유를 소중하게 여기는 거다. 아이를 사랑한다면, 아이의 자유를 정말 소중하게 여겨야 한다. 나는 강연할 때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고 말하지 않는다. ‘살아보니 나는 이렇더라. 여러분은 어떤가?’ ‘이런 것도 있고, 저런 것도 있다. 선택은 여러분이 하라’ 이렇게 말한다. 다시 말해 선택권을 준다. 그렇게 자유를 주는 거다.”
“아이에게 선택권을 주지 않으면, 아이의 자아가 사라진다.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힘이 없어진다. 그게 과연 사랑일까. 사랑을 모르는 사람은 자유를 모른다. 그래서 자유를 줄 수가 없다. 자유는 선택이다.”
“자식이 아주 어릴 때는 보호하는 거다. 지켜주는 거다. 유치원 다닐 때부터 사춘기까지는 손 잡고 같이 간다. 스승과 제자처럼 말이다. 그 다음부터는 달라진다. 아이를 앞세우고 부모가 뒤에 간다. ‘나는 이렇게 생각하는데, 더 좋은 것이 있다면 네가 해라.’ 그런 식으로 자유를 주는 거다. 자유를 모르는 사람은 사랑도 알 수가 없다.”
김형석 교수의 생일은 양력으로 4월23일이다. “그때까지 100세를 사는 거다. 그 다음부터는 101세가 되니까. 그런데 ‘100세를 채우자’는 생각보다 앓지 않고 90세를 사는 게 훨씬 더 중요하더라. ” 김 교수는 요즘도 집필과 강연으로 일정이 빡빡하다. 장수와 건강 비결을 물었더니 “일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답했다. “운동은 건강을 위한 거고, 건강은 일을 위한 거다. 처음에는 돈이 필요해서 일하고, 더 지나면 일이 좋아서 일하고, 나중에는 더 많은 사람의 자유와 행복을 위해서 일하게 되더라.”
그는 지난 여름까지 수영을 했다. 50대 후반부터 했으니 40년이 훌쩍 넘었다. 김 교수는 “수영은 중독이다. 좋은 의미의 중독이다. 지방 강연 끝내고 서울로 오면 힘들다. 내 친구들은 다들 피곤하니까 집에 간다. 수영장으로 향하는 나한테 ‘왜 집에 안 가느냐?’고 묻는다. 그런데 수영을 하고 나면 피로가 다 풀린다. 그래서 수영은 내가 새로워지는 중독이다. 창조적인 중독이다”고 말했다.
인터뷰를 마친 김 교수는 1층과 2층을 잇는 계단을 직접 걸었다. 다리 운동을 위해 굳이 승강기를 타지 않았다. “내게는 건강 자체가 목적은 아니다. 건강은 일을 위해 필요한 수단이다. 지금껏 열심히 일한 게, 거꾸로 건강해진 비결이 아니었을까.”
백성호 종교전문기자 vangogh@joongang.co.kr
※'김형석 교수 인터뷰(하)-100세 철학자에게 종교를 묻다'는 2월 8일 중앙일보 온라인에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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