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태어날 때 얼굴에 피를 쓰고 나왔어. 그런 사람은 살다가 큰 망신을 당한다더라.”
최현숙 구술생애사 작가
여덟 살 때부터 엄마의 돈 심부름에서 삥땅을 시작한 내게, 엄마의 이 말은 늘 마음 바닥에 눌어붙어 있었다. 삥땅이 도둑질을 거쳐 도벽(盜癖)으로 굳어지면서 중지할 수 없었고, 발각돼야 끝낼 수 있다고 생각했고, 그때는 죽어버릴 거라고 생각했다. 스물둘 대학 강의실에서 마침내 발각됐다. 망신(亡身)과 창피(猖披)의 시절. 죽어지지 않았다. 훔쳐 감춘 소망 하나로 무거운 시간들을 혼자 그냥 견뎠다. 좋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박원순이 삶을 끝냈다. 64세. 최근 10년이 정치인과 행정가로서 최고의 시기였고 대통령 자리까지 도전하리라 자타가 인정하던 터에, 성폭력 가해가 발각되자 시급히 끝냈다. 박원순의 죽음은 사회적 타살이라 할 허다한 원통한 죽음들과 달리, 스스로 삶을 정리하고 때를 선택하는 자유죽음과도 달리, 빼도 박도 못할 자살이다. 노무현의 경우 망신을 피한 건지, 조직보위를 한 건지 아니면 또 다른 이유에서인지 나는 정확히 모른다. 권력자의 죽음에 관심 줄 시간이 없었고, 민주당을 포함한 ‘보수양당’의 혈투와 절치부심만 어렴풋이 추측했다. 노회찬과 행보를 달리하고 8년 만에 접한 그의 죽음을 보며 ‘4000만원’(유서 중)에 대해 주변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한 그의 외로움이 사무쳐왔다. 박원순의 죽음은 망신과 함께 권력형 성폭력 가해자라는 자신의 다른 얼굴에서도 도망친 회피다. 고통스럽더라도, 창피당하는 그 얼굴도 살아서 스스로 안아주어야 했다.
노회찬과 박원순이 나와 같은 또래라는 점에 마음이 머문다. 그들의 오류를 따지기 전에 내 속과 생애의 오류를 먼저 뒤진다. 도벽 동안의 분열적 자괴, 발각과 망신, 처벌을 피하게 한 자원, 이후 계속되는 재해석은, 사람과 세상에 대한 내 시선과 태도를 내내 주관하면서 쓸모 있는 어두움으로 내 안에 들어있다. 주변 지인이 망신에 던져지는 걸 보면, 시비를 좀 떠나 힘을 내고 잘 통과하자는 말을 구태여 전한다. 살아 괴로워하고 있다면, 누군가 한 사람은 당신 속 착한 사람을 보아주고 있다고 알리고 싶어서다. 한편 일찌감치 독하게 망신을 통과한 덕에, 자타의 체면치레 속 꼬락서니에 호기심이 돋고 웬만하면 옹호도 하는 눈을 덤으로 얻었다. 사실은 그 눈으로, 살아있는 박원순의 파열하는 자아도, 그가 수고한 좋은 것들도 보아주고 싶은 거다.
권력이란 여차하면 체면까지 두꺼워져, 발각의 순간 죽음도 불사하며 일단 후다닥 피해, 하여튼 망신만은 면하고 싶은, 허술하기 짝이 없는 독이구나. 안희정과 오거돈을 보면서도 중지하지 못한 습(習)은, 끊어내지 못한 벽(癖)이 아닌 권력의 파렴치다. 망신에서 유체이탈한 채 옥중투쟁까지 하고 있는 박근혜의 권력망상과 등 붙은 쌍생아다.
그를 고소한 여성이 마음의 평안을 찾기를. 피해 여성은 불리한 자리에서도 자기 몫의 싸움을 정면으로 감당하고 있다. 속 시끄러운 애도야 각자의 일이라 치고, ‘공소권 없음’ 뒤로 피신한 주검을 서울특별시장(葬)으로 포장한 것은 문재인 ‘형님(남성카르텔)네’ 정권의 집단적 2차 가해다.
심상정은 또 헷갈렸고, 내가 속한 서울시 인권위원회조차 토론과 침묵 끝에 서울특별시장 반대 입장발표를 접었다. 하여 끝나지 않았다.
덜 쥐어 단출한 자리에 도달한 게 참 요행이다 싶은 새벽이다. 이 자리에서도 조심(操心)하고 조신(操身)해야겠다. 살다가 혹 망신의 때를 만나거든, 부디 직면하며 잘 통과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