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디자이너 꿈꾸시나요? 라잇루트가 도와드려요”

신민정 라잇루트 대표
세븐틴, B1A4, 장문복 등 아이돌 스타에게 협찬된 의상 앞에 선 신민정 라잇루트 대표. “박지영 디자이너의 작품”이라며 “각 의상마다 옷 만든 청년 디자이너의 이름을 새긴다”고 말했다. 배우한기자
지난 해 말 이국종 교수가 소장을 맡은 아주대병원 권역외상센터의 의료진 30명은 ‘헬기복’을 바꿨다. 특수원단 하이포라를 사용한 이 옷은 방풍과 방수 기능은 기본, 불에 강하고 빛 반사 기능까지 있어 야간 수술을 할 때 이전보다 수월하다. 의상을 제작한 업체는 2016년 10월 문을 연 ‘라잇 루트(Right Route)’로 20, 30대 스트리트 패션을 주로 선보인다.
“(이국종 교수가) 왜 수술 잘 하시는지 알겠어요. 진짜 까다로우시더라고요.” 최근 서울 중구 신당동 라잇루트 사무실에서 만난 신민정(29) 라잇루트 대표는 “세계 각국의 제복을 찾아 연구하고, 전국을 다 뒤져 특수원단 가공 공장을 찾았다. 애초에 제작 기간을 7개월로 잡았는데 실제로는 9개월 가까이 걸렸다”고 말했다. 신 대표는 “워낙 많은 디자인을 만져보고 만들어봐서 어떤 종류의 옷이든 의뢰 받은 걸 만드는 건 어렵지 않다”고 덧붙였다.
이런 자신감은 라잇루트의 정체성에서 비롯된다. 라잇루트 사업의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건 디자이너 지망생들에게 실무교육을 제공하는 ‘디자이너 프로젝트’다. 참가비 15만원을 내면 3, 4개월에 걸쳐 원단 선택, 디자인 방법, 시제품 제작, 봉제공장 섭외 등의 노하우를 알려주고 원단, 작업실 대여, 모델 촬영 등 의상 제작 전 과정을 지원한다. 단 교육과정에서 만든 의상의 디자인 저작권은 디자이너와 라잇루트가 절반씩 갖는다. 의상을 제작하면 무신사 등 편집숍과 온라인을 통해 판매한다. 제품이 잘 팔릴 경우 옷을 만든 디자이너에게 인센티브가 주어지고, 수익은 다음 디자이너 프로젝트를 위해 투자된다.
라잇루트가 제작한 아주대병원 외상센터 헬기복. 디자이너 프로젝트 출신 이혜림, 조익수씨가 디자인했다. KT제공
나이, 경험, 학력과 상관없이 디자인에 대한 열정만으로 대상자를 선발하는 이 프로젝트의 경쟁률은 평균 20대 1 수준, 최근 10기를 모집했다. 신 대표는 “지원서에 △꿈 △지금 힘든 점 △만들고 싶은 의상 스타일 △라잇루트를 통해 배우고 싶은 점을 쓰라고 한다. 선정 기준이 절실함이기 때문에 각 항목에 4줄 이상은 써야 읽어본다”고 말했다. 이 프로젝트로 올해 초 현대차 정몽구 재단 ‘H-온드림 사회적기업 창업오디션’에서 문화 예술분야 기업에 선정되기도 했다.
신 대표가 라잇루트를 운영하게 된 계기는 두 가지 경험이 맞물리면서다. 학창시절을 미국에서 보낸 그는 대학에서 건축학을 전공했고 집 한 채를 지으면 또 한 채를 저소득층에게 지어주는, 탐스 슈즈의 경영 방식을 건축에 도입한 사회적 기업에서 인턴으로 근무했다. 6개월 후 한국에 돌아와 한 대형 건축사무소 해외사업부에 취직했지만 국내 기업문화가 체질에 맞지 않아 그만두고 영어 강사로도 활동했다. 그 시절 우울을 떨치기 위해 옷, 신발, 패션소품 등을 직접 써보고 후기를 쓴 블로그를 운영했고 “자취집 구할 때 기준이 옷장이 얼마나 있나”였을 만큼 옷을 좋아했던 신 대표는 단번에 파워블로거가 됐다. 패션업체들이 앞다퉈 신제품을 보내오기 시작했다.
고민은 이 달콤한 경험 후에 찾아왔다. “신진 디자이너들이 자기 작품 입어달라고 옷을 보내는데 리뷰 쓰고 몇 달 안가 폐업한 브랜드가 많은 거예요. 국내 패션산업이 청년 디자이너가 자생하기 힘든 구조라는 걸 그때 알았죠.” 대학, 전문학원 등을 통해 한 해 배출되는 패션디자이너는 5,000여명. “창업까지 간 것만으로도 대단한 사람”이란 업계 현실을 알게 됐고, 인턴시절 경험한 사회적 기업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자는 결론에 다다랐다. 대학원에서 사회적기업 운영을 1년 여간 배우고, 직접 옷 만드는 방법을 배웠다. 신 대표는 “옷을 잘 만들려면 많이 입어보고 디자인 목적에 맞는 원단이 뭔지를 아는 게 가장 중요하다는 걸 알게 됐다. 블로그 운영 경험과 봉제공장을 운영한 디렉터 부모님의 도움이 컸다”고 말했다.
신민정 라잇루트 대표. 배우한 기자
지금까지 수십 명이 디자이너 프로그램을 거치면서 저작권 등록된 의상만 100여벌에 달한다. 코레일, 하남 스타필드 스포츠몬스터 등이 이렇게 등록된 ‘디자이너 프로젝트’ 의상 디자인을 보고 단체복을 주문했다. 아주대병원 외상권역센터를 후원하는 KT도 이 옷들을 보고 헬기복 제작을 의뢰했다. 신 대표는 각각의 수요에 맞는 원단을 정하고 그 원단을 능숙하게 다룬 프로젝트 참가자를 골라 디자인을 의뢰, 공동 제작한다. 회사 매출의 8할은 여기서 나온다. 세븐틴, B1A4, 하이라이트, 몬스터엑스, 케이윌, 수지 등 유명 아이돌이 라잇루트의 옷을 찾으면서 유명세도 치렀다. 최근에는 동묘에 공유형 작업실을 열었다.
신 대표는 “스타 디자이너를 배출하려고 라잇루트를 운영하는 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라고 말했다. 백종원 더본코리아 대표가 ‘먹는 장사가 결코 만만치 않다’는 메시지를 주기 위해 SBS 연예프로 ‘골목식당’에 출연하는 것처럼, 디자이너 지망생들에게 패션업계가 버티기 쉽지 않은 곳임을 체감시키려는 목적이 크다. 그는 “프로젝트를 거친 지망생 상당수가 스타일리스트, 의류 쇼핑몰 운영자 등 관련 업계로 진출하거나 아예 다른 직종에 재도전했다. 일단 경험해 보고 디자이너가 적성이 아니라고 생각하면 빨리 다른 길을 찾아보도록 돕고 싶다”고 말했다.
이윤주기자 misslee@hankook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