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은주 서울언주초교사
요즘 선배들은 두렵다. 무슨 말만 하면 ‘라떼족’이라는 말을 들을 것 같아서다. 라떼족은 “나 때는 말이야”를 ‘라떼는 말이야’로 변형하여 풍자하는 신조어이다.
“나때는 이랬는데……”라는 맥락으로 후배에게 충고하거나 자신의 젊은 시절과 다른 요즘 세태를 비교하는 기성세대에게 주로 붙여주는 말이기도 하다.
자칫하면 라떼족이나 ‘꼰대’가 될까봐 눈치가 보여 후배들에게 아무말도 안 한다는 선배들도 많다.
나 역시 이제 막 발령받은 신규교사나 후배들과 이야기 하다가도 몇 년 전에는 어땠다는 말이 나오게 될 때는 유난히 흠칫, 의식하게 된다. 혹시 지금 내가 말하는 게 ‘라떼’같지 않을까 해서 말이다.
그리고 나보다 경력이나 나이가 많은 분에게 과거 이야기를 들을 때는 그 분과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고 허심탄회하게 대화할 사이가 아니라면 은근히 의식한다. ‘이 분이 혹시? (라떼이신가!)’하고 말이다.
과거를 말함은 어느새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조금은 어색한 일이 되었다. 불편함은 ‘라떼는 말이야’가 비판받는 이유에서 온다. ‘과거를 미화하며 변화를 거부하는 구태의연함’이 싫은 것이다.
그런데 얼마 전, 원로선생님 한 분을 알게 되면서 새로운 경험을 했다. 다음 달에 정년퇴직을 하는 분이기에 나와는 30년이 넘는 경력차가 있음에도, 그분의 과거 이야기는 듣기가 참 편안했기 때문이다.
한번은 장학사시험을 준비했던 때를 떠올리며 말씀하셨다. “그때는 관사에 살았는데 새벽에 일어나 공부하다가 6시에 교장선생님이 오시면 또 같이 운동을 했지.”
한참 열정적이고 의지가 넘쳤던 과거를 회상하며 웃으시니, 어느새 나도 같이 웃고 있었다. 원로선생님은 ‘참, 내가 그때 그렇게까지 했네!’하며 기막히면서도 좋은 추억이라 느껴서 웃으셨고, 나는 ‘선생님, 진짜 대단하시네요’하며 그 힘겨운 열정에 인간적으로 공감했기 때문이다.
함께 웃는 그 순간, 느꼈다. 이 분이 과거를 추억하는 모습의 순수함이 나를 웃게 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 순수함의 원천은 바로 ‘나는 나대로 추억을 회상한다’였다. ‘나는 너의 변화를 위해 나의 추억을 강요한다’가 아니라.
그 분은 그저 과거를 회상하며 스스로 그 순간을 즐기고 계셨다. 만약 원로선생님의 말씀이 “그때는 새벽에 일어나 공부하다가도 6시에 교장선생님이 오시면 같이 운동을 했는데, 요즘에는……”으로 끝났다면 대화의 느낌은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왜 같이 할 줄을 모르니?”라던가 “저는 피곤하니 교장선생님 혼자 하시라고 할 걸”같은 ‘예상’이나 ‘비교’가 없다는 점이 포인트다.
현재의 다른 점을 과거와 비교하여 변화를 강요하거나 현재를 평가하려는 의도가 없었기 때문에 회상의 순간을 함께 느끼고 나 역시 ‘사심 없이’ 공감할 수 있었던 것이다.
‘와, 그때 얼마나 힘드셨을까. 체력과 의지가 참 대단하셨네!’하고 말이다. 일부러 기분을 맞춰드리려는 아부 섞인 동감이나 현재를 대변하기 위한 변명을 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나도 재미있게 대화에 참여했다.
나이차가 있든 없든, 얼마나 있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라떼를 만드는 것은 의도의 차이다. ‘가르치려는 의도가 있느냐’, 그런 의도가 있어도 ‘공감이 있느냐’가 핵심이다. 그리고 보통은 공감이란, 인간으로서 경험한 감정만으로 충분하다.
두 사람 사이에 엄청난 시간의 벽이 있다고 해도 인간이기에 느끼는 감정은 각자 살아온 시간 속에서 익히 알고 있다. 자발성 없는 변화를 유도하거나 판단하려는 의도는 내려놓고 인간성 자체에 집중할 때, 즐거운 대화는 얼마든지 가능하다.
‘과거의 나에게는 있었고, 지금 너에게는 없는 것’보다는 ‘지금 이 순간 우리 둘 다에게 있는 것’에 몰입하기. 그렇다면 과거를 말한다고 모두 라떼는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