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프랑스 고성(古城)에 산다 : 여성동아

“‘You only live once’, 즉 인생은 한 번뿐이라는 ‘욜로’ 라이프스타일이 한창 유행했잖아요. 하지만 저는 ‘You only die once’라고 생각하며 살아요. 인간은 매일 아침 새롭게 태어나고 딱 한 번만 죽는 거라고요. 그러니 당장은 아득한 꿈같이 보이는 일이라도 원한다면 무조건 도전해봐야 해요. 저희 부부는 ‘죽기 전에 오래된 낡은 집을 고쳐 살아보기’라는 제 꿈과 ‘자급자족하며 살기’라는 남편의 꿈을 드디어 실현했어요.”
지은 지 1백60년 된 프랑스 시골 마을의 고성(샤토)을 사들여 집으로 꾸민 허은정(54) 씨의 이야기다. 26세에 호주로 건너가 기업 컨설팅을 해온 허씨는 스코틀랜드인 남편을 만나 줄곧 그곳에서 살았다. 부부는 40대 중반 이른 은퇴를 한 뒤 귀농이라는 버킷리스트를 실현하기 위해 인터넷 부동산 사이트를 뒤져 유럽의 시골집들을 찾아다녔다. 그러다 오래된 성을 개인이 살 수 있다는 걸 알고 ‘이거다!’ 싶었다고 한다. 실제로 인터넷에 ‘샤토 포 세일(chateau for sale)’이라고 검색하면 전 세계 성의 구매 정보를 확인할 수 있다. 허씨는 2011년부터 남편, 딸과 함께 호주와 유럽을 오간 끝에 3년 만에 지금의 집을 찾아냈다. 비행기로 24시간 걸려 파리에 도착한 뒤 베르사유 근처에서 차로 3시간 달려야만 도착할 수 있는 곳이다. 마욘주의 한적한 마을에 자리한 고성은 총 420m²(약 1백27평)에 지하 1층, 지상 3층으로 이뤄졌고, 집 앞에는 8260m²(약 2천5백 평)의 농토와 정원이 조성돼 있다. 허 씨는 고성을 매입해 거주하는 것에 대해 “어려운 점은 있지만 원한다면 도전해볼 만하다”고 말한다.
“유럽 전역에는 오래된 성이 많고 실제로 거주하는 경우도 흔하더군요. 성을 사는 건 외국인을 포함해 누구나 가능해요. 다만 거주를 위해서는 매년 거주증을 갱신하는 과정이 필요해요. 유학생의 경우 5년을 살면 시민 자격을 신청할 수 있어요. 저는 남편이 유럽연합(EU) 시민권자라 신고만 하고 살 수 있어 운이 좋았죠. 프랑스는 파리 시내만 벗어나면 집값이 저렴한 편이에요. 저는 10억원 좀 안 되게 줬어요. 고성 가격은 평균 5억~10억원으로 천차만별인데 오래된 건물인 만큼 수리비가 집값에 맞먹는다고 봐야 해요. 프랑스의 경우 방 개수에 따라 보험료도 내야 하고요.”
높은 층고와 섬세한 마루 장식이 예술인 다이닝룸. 커다란 앤티크 테이블과 운 좋게 경매장에서 저렴하게 구매한 의자를 들여놓아 가족과 친구들이 모여 식사할 수 있는 공간으로 재탄생했다(왼쪽). 프랑스 마욘주 시골 마을에 위치한 1백60년 된 고성을 구입해 버킷리스트를 실현한 허은정 씨.
1백60년 된 고성을 자신만의 스타일로 재탄생시킨 집은 프랑스, 이탈리아, 미국 등의 인테리어 잡지에 소개되기도 했다. 하지만 화려한 현재 모습 뒤에는 허씨의 보이지 않는 엄청난 노력이 숨어 있다. 전 주인이 5년간 방치하다시피 한 집은 정화조와 배관·전기배선 공사를 새로 하고, 벽을 뚫고 지붕과 창문을 수리하는 등 고칠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지난 5월 허씨가 출간한 ‘나는 프랑스 샤토에 산다’는 당초 인테리어 서적으로 기획했지만 온 가족이 2011년부터 2013년까지 3년간 집을 고르러 다니고, 5년간 집수리에 매달려야 했던 ‘고생담’을 덧붙이다 보니 에세이가 됐다고.
“처음 봤을 때는 나무를 관리하지 않아 정원은 밀림 같았고 온 집 안에서 곰팡이 냄새가 나다 못해 버섯까지 자라고 있었죠. 남편과 딸은 근처의 사람이 살고 있던 깨끗한 성을 사자고 했지만 낡은 집일수록 제 손으로 꾸려갈 수 있는 게 많을 것 같아 이 집을 사자고 고집을 부렸어요. 호주에 살면서 매년 3, 4개월씩 홀로 프랑스를 오가며 말도 통하지 않는 인부들과 하루 종일 붙어 도면 하나 없이 집을 다 뜯어고쳤어요. 사기를 당하기도 하고, 욕실 공사가 잘못돼 온 집 안에 물난리가 나 말리는 데만 6개월 걸린 끔찍한 일도 있었죠. 실제로 고성을 수리하다 살기를 포기하는 사람도 많다더군요. 저도 그런 순간들이 있었지만 가족에게 큰소리를 쳤으니 끝까지 해야 했죠.”

벼룩시장서 산 낡은 가구로 프렌치 인테리어 완성

게스트룸은 곡선이 아름다운 침대를 배치해 루이 15세 스타일로 꾸몄다. 다이닝룸에 있던 오래된 원목 샹들리에를 재활용했는데, 특별한 장식 없이도 가구들이 가지고 있는 원래의 멋을 살려 감각적인 공간을 완성했다.
공사가 진행되는 동안 허씨가 부지런히 프랑스 전역의 벼룩시장과 앤티크 숍, 골동품 가게를 오가며 장만한 가구와 장식품들은 고성의 외관과 잘 어울리는 앤티크한 프렌치 스타일 인테리어를 완성시킨 주인공이다. 얼핏 보면 실제 왕실에서 사용했음직한 화려하고 고풍스러운 것들이지만 90% 이상은 모두 남들이 사용하다 내놓은 중고 제품이다. 집 안에서 새것은 이불, 숟가락과 젓가락, 밥솥 정도라고. 가족은 그릇과 베갯보마저 남들이 쓰던 것을 사용한다.
1 작은 샤워실과 화장실이 있던 곳을 개조해 만든 세탁실. 무미건조한 벽은 벼룩시장과 골동품 마켓에서 구입한 그림으로 꾸몄다. 2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면 펼쳐지는 복도. 4m 정도 되는 높은 천장에 정교하게 조각된 몰딩이 장식돼 있다. 커다란 앤티크 거울을 달고 맞은편에는 파리 경매장에서 구입한 액자에 1950년대 파리 지도를 넣어 걸었다. 3 이전의 낡은 욕실에 있던 앤티크 욕조를 가족 욕실로 옮겨왔다. 창으로 펼쳐지는 뒷마당 풍경이 욕실의 품격을 한층 높인다.
앤티크 숍에서 구입한 옷장과 액자, 가구, 스탠드, 샹들리에 등으로 고풍스럽게 꾸민 거실. 제2차 세계대전 때 미군이 사용했던 트렁크를 탁자로 활용한 아이디어가 돋보인다.
1 커다란 창문을 열면 넓은 정원이 시원하게 보이는 딸 방. 핑크 컬러 침대와 암체어, 플라워 패턴 커튼으로 소녀 감성이 뿜뿜 나는 공간 완성! 2 3 부부가 사용하는 침실은 루이 16세 스타일 싱글 침대 2개를 붙여 킹사이즈로 만들었다. 앞마당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커다란 창문에는 전 주인이 두고 간 묵직한 원단의 커튼을 리폼해 달아 클래식한 느낌을 더했다.
허씨는 특히 우아한 곡선이 특징인 루이 15세 스타일과 남성적인 직선을 지닌 루이 16세 스타일을 좋아해 인테리어에 적극 활용했다. 안방은 루이 16세 스타일 싱글 침대 2개를 붙여 킹사이즈 침대로 만들었고, 게스트룸에는 루이 15세 스타일의 색깔만 다른 침대 2개를 배치하는 등 방마다 콘셉트를 다르게 했다. 오랜 로망이던 프렌치 침대는 벼룩시장에서 단돈 20유로(약 2만6천원)에 샀다. 앙상한 나무 뼈대만 남아 있던 것을 직접 다듬고 천갈이를 해 세상에 하나뿐인 침대로 탈바꿈시켰다. 중세 스타일 샹들리에와 거울, 액자들을 집 안 곳곳에 배치해 고풍스런 느낌도 더했다. 오래된 옷장은 장식장으로 바꾸어 안에 TV와 냉장고 등을 넣어 감추고, 제2차 세계대전 때 미군이 사용했던 트렁크를 탁자로 활용하는 아이디어도 발휘했다. 집 안을 가득 메운 책들 역시 시장에서 가져온 것들로, 1백 년 넘은 오래된 종이 냄새가 클래식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데 한몫한다. 낡은 가구로 인테리어를 잘하는 방법에 대해 묻자 그는 “인테리어의 원칙은 가족이 편안한 공간을 꾸미는 것”이라며 “중고 가구들은 편히 쓸 수 있고, 물건에 어떤 역사가 담겼는지 상상하는 재미까지 줘 좋다”고 답했다.
자급자족하는 삶을 꿈꾸던 허씨의 남편은 겨울을 앞두고 농토를 갈고 퇴비를 만들고 있다고 했다. 본격적으로 농사를 지을 요량으로 한국에서 배추씨, 무씨, 상추씨 등도 구입했다. 허씨는 봄이 오면 정원에 갖가지 꽃을 심고 닭과 당나귀도 키워볼 생각이다. 매일 아침 빵 굽는 냄새가 잠을 깨우는 평화로운 시골 마을의 삶을 부러워하는 이들이 늘면서 집이 빌 때는 통째로 빌려주기도 한다. 하지만 자칫 호화롭게 느껴질 수 있는 고성에서의 삶을 삐딱하게 보는 시선도 있는 게 사실. 허씨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는다는 듯 활짝 웃으며 말했다. “저희 가족은 돈이 많은 것도 아니고 그저 꿈을 조금씩 실행하며 작은 행복을 만들어가고 있는 거예요. 저를 보고 새로운 꿈을 꾸고 도전하는 분들이 많이 생기면 좋겠어요.”
디자인 이지은 사진제공 청출판